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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상)

다시보는 한국 근대문학 11

도서 이미지 - 태평천하 (상)

채만식

하이안북스|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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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가격정보
전자책 정가 1,000원
구매 1,000원3% 적립
출간정보 2019.05.21|EPUB|6.89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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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 가는 가을 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 날 석양.

저 계동(桂洞)의 이름 난 장자〔富者〕윤직원(尹直員) 영감이 마침 어디 출입을 했다가 방금 인력거를 처억 잡숫고 돌아와, 마악 댁의 대문 앞에서 내리는 참입니다.

간밤에 꿈을 잘못 꾸었던지, 오늘 아침에 마누라하고 다툼질을 하고 나왔던지, 아무튼 엔간히 일수 좋지 못한 인력거꾼입니다.

여느 평탄한 길로 끌고 오기도 무던히 힘이 들었는데 골목쟁이로 들어서서는 빗밋이 경사가 진 이십여 칸을 끌어올리기야, 엄살이 아니라 정말 혀가 나올 뻔했습니다.

이십팔 관, 하고도 육백 몸메……!

윤직원 영감의 이 체중은, 그저께 춘심이년을 데리고 진고개로 산보를 갔다가 경성우편국 바로 뒷문 맞은편, 아따 무어라더냐 그 양약국 앞에 놓아 둔 앉은뱅이저울에 올라 서본 결과, 춘심이년이 발견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이십팔 관 육백 몸메를, 그런데, 좁쌀계급인 인력거꾼은 그래도 직업적 단련이란 위대한 것이어서, 젖 먹던 힘까지 아끼잖고 겨우겨우 끌어올려 마침내 남대문보다 조금만 작은 솟을대문 앞에 채장을 내려놓곤, 무릎에 드렸던 담요를 걷기까지에 성공을 했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옹색한 좌판에서 가까스로 뒤를 쳐들고, 자칫하면 넘어 박힐 듯싶게 휘뚝휘뚝하는 인력거에서 내려오자니 여간만 옹색하고 조심이 되는 게 아닙니다.



"야, 이 사람아……!"



윤직원 영감은 혼자서 내리다 못해 필경 인력거꾼더러 걱정을 합니다.



"……좀 부축을 히여 줄 것이지. 그냥 그러구 뻐언허니 섰어야 옳담 말잉가?"



실상인즉 뻔히 섰던 것이 아니라, 가쁜 숨을 돌리면서 땀을 씻고 있었던 것이나, 인력거꾼은 책망을 듣고 보니 미상불 일이 좀 죄송하게 되어, 그래 얼핏 팔을 붙들어 부축을 해드립니다.

내려선 것을 보니, 진실로 거판진 체집입니다.

허리를 안아 본다면, 아마 모르면 몰라도 한 아름하고도 반은 실히 될까 봅니다. 그런데다가 키도 알맞게 다섯 자 아홉 치는 넉넉합니다. 얼핏 알아듣기 쉽게 빗대면, 지금 그가 타고 온 인력거가 장난감 같고, 그 큰 대문간이 들어서기도 전에 사뭇 그들먹합니다.

얼굴도 좋습니다.

거금 삼십여 년 전에 몇 해를 두고 부안(扶安), 변산(邊山)을 드나들면서 많이 먹은 용(茸)이며 저혈(猪血) 장혈(獐血)이며, 또 요새도 장복을 하는 인삼 등속의 약효로 해서 얼굴은 불콰하니 동안(童顔)이요, 게다가 많지도 적지도 않게 꼬옥 알맞은 수염은 눈같이 희어, 과시 홍안백발의 좋은 풍신입니다.

초리가 길게 째져 올라간 봉의 눈, 준수하니 복이 들어 보이는 코, 부리가 추욱 처진 귀와 큼직한 입모, 다아 수부귀다남자(壽富貴多男子)의 상입니다.

나이……? 올해 일흔두 살입니다. 그러나 시삐 여기진 마시오. 심장 비대증으로 천식(喘息)기가 좀 있어 망정이지, 정정한 품이 서른 살 먹은 장정 여대친답니다. 무얼 가지고 겨루든지 말이지요.

그 차림새가 또한 혼란스럽습니다. 옷은 안팎으로 윤이 지르르 흐르는 모시 진솔 것이요, 머리에는 탕건에 받쳐 죽영(竹纓) 달린 통영갓〔統營笠〕이 날아갈 듯 올라앉았습니다.

발에는 크막하니 솜을 한 근씩은 두었음직한 흰 버선에, 운두 새까만 마른신을 조그맣게 신고, 바른손에는 은으로 개대가리를 만들어 붙인 화류 개화장이요, 왼손에는 서른네 살배기 묵직한 합죽선입니다.

이 풍신이야말로 아까울사, 옛날 세상이었더면 일도(一道) 방백(方伯)일시 분명합니다. 그런 것을 간혹 입이 비뚤어진 친구는 광대로 인식 착오를 일으키고 동경, 대판의 사탕장수들은 캐러멜 대장감으로 침을 삼키니 통탄할 일입니다.

인력거에서 내려 선 윤직원 영감은, 저절로 떠억 벌어지는 두루마기 앞섶을 여미려고 하다가 도로 걷어 젖히고서, 간드러지게 허리띠에 가 매달린 새파란 염낭끈을 풉니다.



"인력거 쌕이(삯이) 몇 푼이당가?"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당자 역시 전라도 태생이기는 하지만, 그 전라도 말이라는 게 좀 경망스럽습니다.



"그저 처분해 줍사요!"



인력거꾼은 담요로 팔짱낀 허리를 굽신합니다. 좀 점잖다는 손님한테는 항투로 쓰는 말이지만, 이 풍신 좋은 어른께는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다. 후히 생각해 달란 뜻이지요.



"으응! 그리여잉? 그럼, 그냥 가소!"



윤직원 영감은 인력거꾼을 짯짯이 바라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풀었던 염낭끈을 도로 비끄러맵니다.

인력거꾼은 어쩐 영문인지를 몰라 뚜렛뚜렛하다가, 혹시 외상인가 하고 뒤통수를 긁적긁적하면서,



"그럼, 내일 오랍쇼니까?"



"내일? 내일 무엇 하러 올랑가?"



윤직원 영감은 지금 심정이 약간 좋지 못한 일이 있는데, 가뜩이나 긴찮이 잔말을 씹힌대서 적이 안색이 변합니다.

그러나 이편 인력거꾼으로 당하고 보면, 무엇 하러 오다니, 외상 준 인력거 삯 받으러 오지요라는 것이지만, 어디 무엄스럽게 그런 말을 똑바로 대고 하는 수야 있나요.

그러니 말은 바른 대로 하지 못하고, 그래 자못 난처한 판인데, 남의 그런 속도 몰라주고 윤직원 영감은 인제는 내 할 말 다아 했다는 듯이 천천히 돌아서 버리자고 합니다.

인력거꾼은, 이러다가는 여느 때도 아니요, 허파가 터질 뻔한 오늘 벌이가 눈 멀뚱멀뚱 뜨고 그만 허사가 되지 싶어, 대체 이 어른이 어째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어도, 그건 어찌 되었든지 간에 좌우간 이렇게 병신스럽게 우물쭈물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고 크게 과단을 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목차

<태평천하 (상)>

1. 윤직원 영감 귀택지도(歸宅之圖)
2. 무임승차 기술
3. 서양국 명창대회
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5. 마음의 빈민굴
6. 관전기(觀戰記)
7. 쇠가 쇠를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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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채만식
蔡萬植
(1902년 ~ 1950년)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 극작가, 문학평론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
광복 후 자전적 성격의 단편 〈민족의 죄인〉(1947)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변명했으며 이 때문에 자신의 친일 행적을 최초로 인정한 작가로 불린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전 49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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